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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알아보기/야구역사 알아보기

[인천야구역사] 삼미슈퍼스타즈는 어떤 팀이었을까? 인천야구의 시초,

by 리듬을즐기는표범 2017.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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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프로야구역사상 인천에는 여러개의 프로야구팀이 있었다. 삼미슈퍼스타즈, 청보핀토스, 태평양돌핀스, 현대유니콘스, SK와이번스라는 5개의 팀이 존재하였고, 현재는 SK와이번스가 유일하게 남아있다. 한국프로야구는 1982년에 시작되었다. 여러개의 팀이 공존하였었는데, 인천에서는 삼미가 무역, 해운, 광역, 철광 등을 주종목으로 한국프로야구에 끼어들었다. 삼미는 아쉽게도 프로야구에 홍보효과를 누릴만한 소비재 분야의 계열사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1982년에 창단하여 1985년에 매각이 되는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인천에서의 프로야구구단 첫 창단 - 삼미슈퍼스타즈가 창단 되다.

 

 

대한민국에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최초에 6개의 팀으로 시작이 되었는데, 인천에서 시작하게 되었던 팀이 삼미 슈퍼스타즈이다. 연고지는 인천-경기-강원을 기반으로 첫 스타트를 끊었다. 연고지가 인천, 경기, 강원, 이북5도까지 모두 합쳐진 연고제라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에는 연고제가 광역연고제였는데 인천, 경기, 강원을 기반으로 한 만큼 첫 홈개막전 역시도 춘천에 있는 춘천야구장에서 경기가 열렸다. 당시에는 춘천구장이 제2의 연고지로서 경기가 지속적으로 있었다. 지금의 삼성이 포항구장에서 경기를 하거나, 한화 이글스가 청주구장 등에서 경기를 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후에 춘천구장과 인천도원구장, 수원구장에서 경기가 열렸었다. 당시 KBO는 애초에 강원도가 고향인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에게 인천, 경기, 강원 연고지를 사용할 프로팀 창단을 제안했었다. 하지만 현대그룹은 당시 88올림픽 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이 때문에 프로스포츠 팀 창단을 거절하게 되었다. 급하게 대타를 찾는 과정에서 삼미그룹의 김현철 회장이 뛰어들게 되어 삼미 슈퍼스타즈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삼미슈퍼스타즈의 오명 역대 최대연패 1할대 승률은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프로야구 출범 전 많은 인천 야구팬들은 한국 야구의 시초인 인천에서 좋은 성적을 기록하기를 바라며, 경기를 지켜보았다. 첫 경기에서 안호봉의 3실점 완투와 양승관의 3타수 2안타 2타점의 맹활약으로 삼성 라이온즈를 5대3으로 이기면서 시작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시작은 암흑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애초에 창단 당시에 국가대표 출신이 한명도 없는 최약체의 팀으로 시작한 삼미슈퍼스타즈는 직장인 야구단 수준밖에 되지 못했다. 그렇기에 승리가 쉬울 까닭이 없었다. 항상 6개팀 중 6위를 열심히 기록하였다. 그러던 도중 1983년도에 삼미슈퍼스타즈팀에 일본프로야구 출신인 재일교포 장명부가 입단하였다. 1983년도에 전반기 후반기에 모두 2위를 차지하는 쾌거를 보이면서 암흑기에서 벗어나는 듯하였다. 1983년도 장명부는 너구리라는 별명을 가지고 엄청난 활약을 펼쳐보였는데 30승을 할 경우 당시돈으로 1억원이 연봉이 된다는 조건을 구두로 약속받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돈을 결국 받지 못했다고 한다.

 

1982년 삼미슈퍼스타즈는 15승 65패(전기 10승 30패, 후기 5승 35패)라는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전세계 프로야구뿐만이 아니라 어떤 스포츠에서도 없는 전무후무할 0.188인 1할대의 승률로 시즌을 마쳤다. 또한 당시 OB베어스(現 두산베어스)에게는 16승 전패 기록하기도 하였다. 1985년에는 또하나의 대기록이 탄생하였는데 1985년 3월 31일부터 4월 29일까지 무려 18연패를 작성하였다. 이 기록은 훗날 대구 오리온스에게 32연패라는 기록으로 깨졌지만 프로야구에서는 역대 최다연패로 기록을 하고 있다. 1999년에는 쌍방울 레인더스가 기록을 깰뻔하였으나, LG트윈스를 이기는 바람에 연패의 기록을 세우지 못했고, 2002년 시즌에는 롯데 자이언츠가 그리고 가장 최근으로는 2010년 기아타이거즈의 16연패가 그 뒤를 잇고 있다.

 

전대 미문의 전설을 기록도 남겼던 삼미슈퍼스타즈의 빛 1983년 장명부의 활약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삼미슈퍼스타즈는 전력보강과 야구 활성화를 위한 추진으로 재일동포 선수 영입을 추진한다. 이때 삼미슈퍼스타즈에 입단하게 된 선수가 장명부이다. 당시 그의 계약금은 4500만원, 연봉 7500만원, 부대비용(세금,아파트,자동차) 6000만원으로 토탈 1억 8000만원의 금액을 받고 입단하였다. 당시 최고 연봉자인 박철순 선수가 2400만원을 받고 있던 점을 감안한다면, 실로 엄청난 차이였다. 장명부는 입단 후 너구리라는 별명을 가지고 다녔다. 공식데뷔전에서 완급조절을 하면서 위기때는 전력투구, 평소에는 편안한 투구를 던졌다. 능수능란한 경기력으로 그는 이날 너구리라는 별명으로 한국야구무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장명부의 인천 삼미슈퍼스타즈/청보핀토스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선발

완투

완봉

방어율

탈삼진

83

삼미

슈퍼스타즈

60
(1위)

427⅓
(1위)

44

36
(1위)

6
(1위)

2.34
(2위)

30
(1위)

16

6
(3위)

220
(1위)

84

45
(3위)

261⅔
(2위)

25

15
(1위)

2
(3위)

3.30

13

20

7
(4위)

145
(4위)

85

삼미

슈퍼스타즈

청보핀토스

45
(3위)

246
(2위)

35

10
(4위)

0

5.30

11

25
(1위)

5

128
(3위)

 

 

일화로는 당시 훈련할때 타격 훈련도 함께 진행을 했었는데, 재일동포에 대한 편견때문이었는지 이를 보는 시선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너구리라는 별명에 한 몫을 더하는 모습이다. 그는 한국프로야구에와서 심리전도 도입하고 타자 견제를 위한 빈볼성 투구도 서슴치 않았는데 이 때 벤치클리어링도 한국프로야구에 첫 도입이 되도록 이끌어낸 선구자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장명부는 1983년 한국야구에 역사를 새로썼다. 60경기 등판, 44경기 선발, 30승(28선발), 36완투, 26완투승, 6완봉승, 8경기 연속 완투승이라는 현대 야구에서는 있을 수 없는 기록을 만들어냈다. 30승을 만들 경우 보너스 연봉 1억원이라는 당근에 속았던 장명부는 한국야구에 진저리를 쳤고, 또한 1983년도의 혹사로 인해 몸이 망가질대로 망가져버려 그 이후에는 이렇다할 좋은 성적을 만들지 못했다. 한 시즌에 400이닝을 던진다는 것은 유례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1984년의 이렇다할 좋은 성적이 아닌 성적 역시도 45경기 25선발 15완투 262.1이닝을 했으며, 1985년에는 45경기 35선발 10완투 246이닝을 기록했다. 그렇다해도 1984년에 WAR(팀승리기여)는 1위였고, 10승을 거둔 투수였다. 그의 기록은 앞으로 깨질 수가 없고, 깨져서는 안되는 기록이 되어버렸다. 그것이 인천 삼미 슈퍼스타즈에서 나온 기록이다.

 


삼미슈퍼스타즈 1985년 역사속으로 사라지다.

 

연도

정규시즌 순위

최종 순위

팀이름

경기수

승률

1982

6위/6팀

6위

삼미 슈퍼스타즈

80

15

65

0

0.188

1983

3위/6팀

3위

100

52

47

1

0.525

1984

6위/6팀

6위

100

38

59

3

0.392

1985

6위/6팀

6위

55

15

40

0

0.273

 

삼미슈퍼스타즈는 1985년 청보식품에게 매각되면서 역사속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18연패를 끊자마자 바로 다음날 청보핀토스에게 매각이되면서 삼미슈퍼스타즈는 프로야구에서 사라지게되었다. 삼미그룹의 재정적인 문제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당시 삼미그룹의 회장이었던 김현철 회장은 엄청난 야구 광팬이며, 메이저리그팬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삼미슈퍼스타즈를 매각하면서 밤새도록 눈물을 흘렸다는 풍문이 있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장명부라는 선수를 비롯해 인천 야구팬들에게 많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박민규의 소설인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는 소설이 출시 되었고,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이 극장에서 상영되기도 하였다. 팀의 심볼은 다른팀들은 동물을 한 반면에 베트를 든 슈퍼스타를 하고 있다. 인천이 구도였던 것도 있지만, 당시 슈퍼맨이 최고 인기스타였기 때문에 슈퍼스타즈가 마스코트였던 걸로 보인다.

 

이후 삼미그룹은 구단 매각 당시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재정위기에 몰려있었다. 해운업이 가장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70년대말 해운 경기가 호황을 누려 그쪽에 편승하면서 해운업에 대한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시켰다가 경기호황이 길지 않고, 불황이 찾아왔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석유파동이 겹치면서 결단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룹사옥까지 팔면서 사업을 이어나가던 삼미그룹은 97년 3월 IMF파동 직전 부도가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현재 현대비앤지스틸이라는 중소건설사가 있는데, 삼미그룹과 큰 연관성은 없으나, 삼미주식회사를 인수하고 삼미그룹의 부도 전 마크인 삼미마크를 사용하고 있는 건설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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