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계의 거장, 명장.
한국야구계의 많은 것들을 남긴
김성근 그는 누구인가?
이름 : 김성근
출생 : 1942년 12월 13일(교토, 일본)
국적 : 대한민국
신체 : 180cm, 82kg, 좌투좌타(투수, 1루수)
학력 : 교토시립 시조중학교
교토부립 가쯔라고등학교
동아대학교(중퇴)
경력 : 교통부(1961)
기업은행(1962~1968)
지도자경력 :
마산상업고등학교 감독 (1969~1970)
기업은행 투수코치 (1970~1971)
기업은행 감독 (1972~1975)
충암고등학교 감독 (1976~1979)
신일고등학교 감독 (1979~1981)
OB 베어스 투수코치 (1982~1983)
OB 베어스 감독 (1984~1988)
태평양 돌핀스 감독 (1989~1990)
삼성 라이온즈 감독 (1991~1992)
해태 타이거즈 2군 감독 (1994~1995)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1996~1999)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 (2000)
LG 트윈스 2군 감독 (2001)
LG 트윈스 1군 수석코치 (2001)
LG 트윈스 감독대행 (2001)
LG 트윈스 감독 (2002)
치바 롯데 마린즈 1·2군 순회코치 (2006)
SK 와이번스 감독 (2007~2011)
고양 원더스 감독 (2012~2014)
한화 이글스 감독 (2015~2017)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부 특별 어드바이저 (2022)
지도자 은퇴.
現 JTBC 예능프로그램 야구단 최강몬스터즈 감독(2022 ~ )
김성근 그는 누구인가?
야신으로 불리는 김성근
그는 어떠한 삶을 살았고, 야구계에 남긴 업적은 무엇이길래
야신으로 불리게 된 것일까?
김성근 감독의 최대 업적으로 뽑히는 것은
2007년 SK와이번스에 부임후 2007~2010년까지 1121의 순위로 4년간 우승을 이끌었던 점이다.
그리고 대중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져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김성근 감독의 어린시절.
김성근감독은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야구를 시작했다.
중학교 당시 우익수 포지션으로 야구를 했는데, 김성근 감독의 말로는 지금은 우익수가 굉장히 중요한 포지션이지만 그때 당시에는 우익수가 가장 못하는 사람이 보는 포지션이라고 표현을 했다.
(사실 지금 사회인 야구에서도 우익수가 가장 못하는 포지션이긴함. 사회인야구선수 우타가 많고, 다들 당겨칠줄만 알아서 타구가 좌측으로 대부분 간다)
김성근은 고교진학 당시 야구 명문고에 진학하고 싶어했으나, 또래 일본인들보다 야구 실력이 부족하여 진학을 할 수 없었다. 대신 공립고교인 가쯔라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가쯔라고는 야구부가 있긴 하였으나, 야구부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의 야구부였다고 한다. 자서전이나 인터뷰를 통해 살펴보면, 일반고등학교의 클럽활동같은 개념의 야구부수준이었다. 주5일 정규수업 모두 참여에 주말에만 경기를 했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한다.
자서전을 보면 훨씬 열악한 상황 속에서 야구훈련을 한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제대로된 운동장도 없었고 글러브나 방망이들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돌멩이를 강으로 던지면서 훈련하던게 전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라고 한다. 또한 어린시절 매우가난하게 보냈다고 한다.
야구잡지를 보며 야구 동작을 따라하는 것이 야구 연습에 가장 도움이 될 정도였다고 한다.
야구부 감독은 일반과목 선생님이었으며, 선수들이 부족하여 다른 운동부에서 선수를 꾸어와서 경기에 나갈 정도였다고 하니 전국대회는 꿈도 못꿀만 아니라, 야구선수로서의 대학진학은 물론 선수로 진학하는 것은 불가한 일에 가까웠다고 한다. 이렇게 김성근의 야구인생은 막을 내리려고 했다.
근데 고등학교 3학년이던 시절 1959년 김성근은 재일동포학생야구단에 뽑혀 한국으로 처음 방문하게 되었다.
그 당시 김성근의 모친은 북한의 선전인 "만민이 평등하며, 모두가 쌀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는 부유한 나라가 되었다."라는 이야기에 혹하여 온가족이 재일교포 북송사업에 지원했었다. 모든 서류절차를 마쳤고 북한으로 들어갈 일만 남았었는데, 한국에서 돌아오자마자 김성근은 어머니를 설득하였다.
듣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 한국도 나름대로 발전하고 있다고 설득하였고, 중요한 것은 북한에 야구가 없었기 때문에 북한보다 남한으로 가는 것을 원했다. 그리고 그의 설득끝에 가족은 북한행을 포기한다.(김성근 인생 신의 한수임)
성인이 된 김성근 그리고 데뷔
그리고 1960년 김성근은 부산에 있는 동아대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동아대 당시 언어소통의 문제 등으로 인해 적응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1961년 난카이 호크스 2군캠프 테스트를 받는 등 독립리그팀들에 지원했으나 번번히 고사하였다. 여러차례 실패의 끝에 상호차량에 입사하게 된다. 상호차량 야구부는 일본야구에서 회사생활을 하면서 야구를 하는 실업팀의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김성근은 굉장히 수준낮은 팀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으나, 야구로 돈을 벌 수 있을 만큼의 실력을 갖춰야만 뛸 수 있는 리그이다.
프로 > 회사등록팀 > 클럽팀(야구로 돈을 벌수 있는 마지노선) >쿠사야구팀(야구돈안받음-동호회개념)
김성근은 교토 상호차량에서 선수생활을 하다가 1961년 재일교토 선배의 도움으로 한국의 교통부 실업야구팀으로 입단을 하며, 한국 야구계에 발을 디딛게 되었다.그리고 1962년 기업은행으로 이적을 하였다.
1961년 김응용 백인천과 함께 아시아 야구선수권에 나가서 준우승에 기여했다. 그 당시 국제대회가 없었던 만큼 단 한번이라도 국가대표선수 출신이라는 것은 엄청난 경력이다. 그리고 이것이 김성근의 유일한 국가대표 경력이기도 하다.
1963년 대통령배 가을리그 경기에서 인천시청과의 대결에 노히트노런 사사구 1개를 기록하는 등 위력적인 투수였다.
실업야구리그가 처음으로 시작한 1964년 패넌트레이스에서 20승 5패로 다승 2위로 시작하였다. 1위는 배수찬 20승 4패. 승률에서 밀려 2위이다.
일본에서 프로 엘리트 선수처럼 야구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일본에서 돈을 받으며 야구를 할 수 있었던 실력과 당시 프로리그도 없던 우리나라와 비교할 때 국가대표급 수준 실력의 선수였다고 말할 수 있다.
9경기 연속 완투 등의 선수 신체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한 시절 경기를 뛰었고, 잘못된 야구지식 등으로 인해 1969년 27세의 어린나이에 선수생활을 그만두게 된다. 김성근의 말로는 경기전날까지도의 폭음으로 인해 몸관리에 실패하였다고 하지만... 시절이 시절인 만큼 안타까운 선수 운명이기도 하다.
지도자 김성근
1989년 태평양돌핀스의 돌풍시절.
김성근 감독에게는 꼴찌에서 일등으로 라는 말이 항상 따라다닌다.
사실 꼴찌팀을 일등으로 만든적은 없으나, 하위권팀을 리빌딩하여 상위권팀으로 도약해내는데 전문가라는 의미로 쓰였다.
시작은 1989년 태평양돌핀스의 돌풍이다.
1989년 태평양돌핀스의 돌풍. 김성근 감독의 오대산극기훈련과 인천야구의 첫 가을야구.
태평양 돌핀스의 돌풍은 위의 링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간략하게 설명한다면,
프로야구 원년구단 6개구단인시절
삼미슈퍼스타즈는 원년부터 4년간의 6개구단중 성적이 6366 (꼴찌,중간,꼴찌,꼴찌)이다.
그리고 청보핀토스는 다음해부터 6개구단중 6등
1개구단이 추가된 총 7개구단중 6등과 7등을 각각 기록했다.
그리고 태평양돌핀스가 인수했는데 인수하자마자 꼴찌 7위를 기록했다.
역대 성적순위는 63666677 을 기록했는데,
꼴찌가 아닌적이 2년차인 3위와 1개구단이 추가된 청보2년차 6위(뒤에서2등) 이다.
그리고 태평양돌핀스는 그다음해에 꼴찌를 기록한다.
1982년 6위 / 6위
1983년 3위 / 6위
1984년 6위 / 6위
1985년 6위 / 6위
1986년 6위 / 6위
1987년 6위 / 7위
1988년 7위 / 7위
1989년 3위 / 7위 (김성근부임)
꼴찌에서 김성근 감독은 오대산극기훈련과 엄청난 훈련량으로 포스트시즌에
인천야구팀을 진출시켜 3위를 기록하게 한 것이다.
이듬해 성적부진과 각서파동등으로 인하여 경질이 되었으나
많은 인천야구팬들은 인천야구의 황금기를 태평양돌핀스의 1989년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다.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시절
태평양을 떠난 후 OB베어스와 삼성라이온스에서 아쉬운 성적을 기록하며
감독으로서 잊혀져 갔으나,
1996년 쌍방울 레이더스로 복귀하였다.
한국야구계의 원로로 당시 높은 인성을 가졌던 이용일 쌍방울 구단주대행은
초기에 쌍방울이 웰빙야구를 선호하며 장기적인 전력 상승을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91년 6위 / 8위
1992년 8위 / 8위
1993년 7위 / 8위
1994년 8위 / 8위
1995년 8위 / 8위
1996년 2위 / 8위(김성근 부임-플레이오프 패로 3위)
1997년 3위 / 8위
이러한 처참한 성적의 탓에
이의철 구단주를 찾아가 이용일은 설득하였다.
"커다란 개혁없이는 팀을 정상궤도에 진입시키기 힘들다."
"우수한 지도자의 자격으로 4가지 기준이 있다. 풍부한 경험, 데어터에 근거한 작전, 야구에만 전념하는 인물, 인간적으로 선수들에게 존경받을 사람"
이 당시 쌍방울 레이더스의 감독후보로는 김성근, 김영덕, 백인척, 박영길, 강태정, 백기성, 이희수, 김우열 등의 거론되었는데,
이용일은 김성근을 가장 적임자로 꼽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선수와 더불어 같이 생활하며 훈련에 온 힘을 쏟는 지도자로서 김성근을 꼽은 것이다.
당시 구단주는 연고지인 전북지역 출신으로 젊은 감독을 선호했다. 그러나 이용일은 지역출신 감독은 팀을 다잡아놓고 만들어도 늦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김성근을 영입하였다.
김성근 감독의 목표승수는 시즌 126경기 中 최소 60승이었다.
60승은 5할에 조금 못미치지만 5위가 기록한 승수로 꼴찌팀의 선수단에게 승리가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참고로 김성근 부임이전 4년간은 50승에 승률 4할도 채우지 못했다. 쌍방울 원년 52승이 최다승수였다.
그리고 혹독한 훈련을 통해 쌍방울은 결실을 맺는다.
4월 9승 5패,
5월 10승 12패,
6월 2승 8패 후 8연승
7월 9승 9패
(14일~28일) 13연승
8월 30일 60승 목표달성으로
70승 2무 54패의 성적으로 1996년도를 맞이한다.
이때 홈구장 17연승 전주종합운동장 쌍방울레이더스가 세운 기록은
KBO역사에서 아직도 깨지지 않은 기록으로 신화처럼 남아있다.
환골탈태한 모습을 보고 언론과 쌍방울의 팬들은 경악하였고, 이때 쌍방울의 경기가 있는 날에는
전주종합운동장에 암표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한다.(한화이글스도 마찬가지이긴 했다.)
시련은 있어도 패배는 없다 1996년 1997년 쌍방울레이더스
쌍방울은 96년 김성근을 영입하면서
선수단도 영입을 한다.
이때 노장 배태랑들을 영입하면서 반등을 꿈꿨다.
사실 쌍방울에 전성기를 마치고 후배에게 주전을 내줬던 많은 배테랑들과 무명선수들이 많이 왔던 이유중에 하나는 쌍방울이 워낙 약체의 팀이었고 당시 최태원과 조원우를 제외하면 누구도 막강한 주전선수가 없었기 때문에, 주전의 자리를 차지 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기도 했다.
하지만 선수영입에는 한계가 있었다.
지금과 같은 FA나 드래프트 같은 제도가 자리잡은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혹독한 훈련만이 전력 향상의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1990년대까지는 아직 먹혔던 시대이다.
김성근 감독이 취임한 후 성탄절이며 1월1일에도 쉬지않고 훈련을 계속이어갔다.
훈련만이 실력을 늘리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선수였던 김호는 연습한게 아까워서 이겼다고 표현했다. 남들 놀때 연습했는데 지는것이 억울해서 가슴에 독기를 품었다고 한다.
당시 중심타자중 한명인 심성보에 따르면 상상도 못할 훈련이 계속되고 타자들은 손바닥이 찢어져 스윙을 할 수 없었지만 감독님 앞에서는 수천번씩 다시 배트를 휘들렀고, 내야와 외야 상관없이 모두 하루 1천개 이상씩 펑고를 받았다. 휴식일에도 어디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다음날 몸이 얼마나 힘들지 걱정뿐이었다고 한다.
1997년도까지 높은 성적을 기록한 쌍방울 레이더스였지만
이후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핵심전력들이 빠져나갔고, 낮은 성적을 기록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당시 전주, 전북의 쌍방울 레이더스팬들은 그날을 아직도 추억하고 있다.
2001~2002년 LG트윈스 김성근 감독시절
2001년 LG트윈스는 시작과 함께 엄청난 부진을 겪었다. 당시 LG트윈스 2군감독인 김성근을 시즌 시작 10일만에 1군 수석코치로 임명하며 강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결국 5월 16일 이광은 LG트윈스 감독이 경질되고 김성근 수석코치가 감독대행으로 남은 98경기를 이끌게 되었다.
이광은의 2001년 LG트윈스는
9승 1무 25패의 처참한 성적이었다.
2001년에는 5월 후반부터 꾸준히 승수를 올리며 시즌 후반기 4강 다툼에까지 뛰어들었으나,
6위라는 성적을 기록하며 2001년을 마무리하였다.
2002년 김성근 감독은 감독대행 꼬리표를 벗어던지고 감독이 되었다.
시즌 초반 극심한 부진을 겪으며 최하위를 기록하는 수모를 겪으며 시작했다. 이때 경질설이 돌았으나
여름부터 반등을 시작하면서 극적으로 두산을 넘어서 4위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한다.
준플레이오프 승!
플레이오프 승!
한국시리즈 진출을 이뤄낸다.
그러나 삼성라이온스와의 대결에서 2승 4패로 아쉬운 준우승을 겪었다.
이시절 김응용감독으로부터 야구의 신과 경기를 하는 것 같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야신으로 별명을 얻게되었다.
2002년 시즌이후,
LG트윈스의 단장이 바뀌었고, LG는 전통적으로 신바람야구를 추구하는 팀이었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의 야구스타일은 짠물야구로 팀색깔과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짠물야구를 좋아하지 않는 팬들도 많았다.
하지만 팀을 리그 정상급으로 올린 것만은 확실했다고 본다.
그렇게 준우승을 하였으나 김성근 감독은 LG트윈스에서 이별하게 되었고,
엘지트윈스는 6668587667 이라는 이후 절망적인 성적으로 남게된다.
혹 사람들은 김성근의 저주라고 말하기도 한다.
김성근 감독이 떠난 후 팀의 앞날은? 김성근의 저주는 무엇인가?
김성근은 이후 5년간
감독직을 수행하지 않았다.
찾는 팀이 없었으며, 그간 일본의 치바 롯데에서 이승엽이 있는 팀에서
코칭스태프를 하면서 보냈다.
이시절 자신의 자서전에 따르면, 당시 감독인 바비 발렌타인으로부터 야구관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것들을 배우고 스스로 성장했다고 평가한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거시적인 관점으로 야구를 바라보게되었고, 야구에서 제2의 스승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높이 그를 평가하며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2007~2011년 SK와이번스 김성근 감독
SK와이번스는 인천에 새로 둥지를 틀면서, 현대의 배신으로 인해 떠나버린 인천야구팬들의 마음을 제대로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성적만이 인천에 잘 자리잡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 SK와이번스는 김성근 감독의 영입을 단행한다.
그리고 정규시즌 우승과 한국시리즈 2연패 후 4연승이라는 최초 역전우승까지하며 인천SK왕조의 시작을 알렸다.
2008년에는 압도적으로 126경기 기준 83승이라는 역대급 강팀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한국시리즈에서 1패를 내주고 4승을 내리찍어내리며 KBO리그 2연패를 하였다.
2009년에는 무승부를 패와 동일시하게 여기는 이상한 규칙이 생기면서
정규시즌에서 기아타이거즈에게 기존 승률계산시 1위이며, 변동된 승률계산시 2위가 되는 상황이되었다.
그리고 한국시리즈에 올랐다.
7차전에서 나지완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으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이때 정규시즌 19연승기록 그리고 다음해까지 이어져 22연승을 기록하였다.
2010년 역시 정규시즌 1위를 하고, 4년연속 한국시리즈 진출 후 삼성라이온스를 4경기만에 모두 승리를 하면서 통합우승을 차지하였다. 우승의 원한을 풀때로 다 풀었다.
SK가 최강으로 군림할때, 타팀들도 SK를 굉장히 많이 따라했다. 벌떼야구, 불펜투수 강화, 무사 주자 나가면 진루시키기, 강한수비력 키우기, 훈련량 늘리기 등.
김성근 야구는 재미가 없다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김성근 감독은 "승리하고 싶다. 비난 없는 패자는 의미가 없다." 라는 말로 응수하였다.
2011년도 SK와이번스는 김성근감독을 경질한다, 그리고 이만수 2군감독대행으로 꾸려나갔다.
이는 문학구장 소요사태로 이어지게되고었다.
도원전사, 도원아재, 인천아재. 구도 인천 도원야구장의 사건사고 이야기.문학경기장 소요사태
SK와이번스는 우승이 이제 당연시되고
우승에 대한 목마름을 잃어버린 결정이라는 평가를 받는다.(박노준 칼럼 인용)
김성근의 선수단코칭스태프와 프론트간에 사이가 좋지 못했다.
김성근이 원하는 스타일을 다 맞추기 힘들었던 프런트는 그룹차원에서 재계약하라는 통보를 받았으나,
재계약할 것이다. 곧한다, 올스타이후, 시즌이후에 보자는 식의 계속적인 미룸에 따라,
홧김에 올시즌끝나고 감독안한다고 인터뷰햇다가 SK와이번스가 이를 받아 바로 경질했던 것이다.
이렇게 SK와이번스를 떠났지만
SK와이번스는 2000년대 후반
5년 연속 최강으로 군림하며, 아시아시리즈에 SK와이번스가 올라오는게 지겹다던 일본야구팬들의 원성을 듣던 최강의 팀이었다.
2012~2014년 고양원더스 김성근 감독
고양원더스는 갈곳없는 방출 선수, 신인드래프트에 지명못받은 신인등 재기를 꿈꾸는 선수들을 훈련을 통하여
1군 무대에 복귀하는 것을 목표로 생긴 팀이다.
그리고 KBO리그에서 2군(퓨쳐스리그)무대에서 경기를 뛸 수 있도록 해주었고,
고양원더스에 외국인 선수도 영입하면서, 2군 선수들도 외국인 투수의 공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1군무대로
각 구단이 요청만 하면 곧바로 보내줄 수 있다고 밝혔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훈련량이 많아 중도탈락하는 인원도 많았고 선수단 개편도 잦았다.
불성실하거나 군입대를 하는 선수들도 많았고, 퇴단은 시즌 중도에 많이 이뤄졌다.
그리고 명예의 전당(프로진출)에 입성하는 선수들도 있었다.
애초에 지명 받지 못한 선수들을 프로로 보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본다.
현재 원더스 출신으로 1군무대에서 이름을 알리며 선수생활을 하고있는 선수는
조용호와 신성현 뿐이다.
그러나 22명의 프로를 배출을 해냈다.
2015~2017년 한화이글스 김성근 감독
2009년부터 2014년까지
8886899
의 꼴찌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던 한화에 김성근 감독이 부임했다.
저기 8과 9가 있고 현재는 10개구단이라 모를 수도 있겠으나,
저위의 8은 8개구단체제 시절이고 9는 9개구단 체제 시절이다.
신생팀이 생겼어도 꼴찌였다.
김성근 영입이전 한화이글스는 대학야구팀보다 못할 수준의 팀처럼 보였다.
실책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 당시 본인도 야구장에 가장 많이 가던 시절이었는데,
한화는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할 팀이며, 한화이글스가 있기에 한국프로야구의 수준이 낮아진다고 생각하였다.
발단은 한화팬들의 한화본사에서 김성근 감독 영입 1인시위가 시작이었다.
그리고 김성근을 영입하였으나,
2015년 6위 2016년 7위로 마무리한다.
비록 순위는 쌍방울, 태평양, SK 시절처럼 급상승은 하지 못하였으나,
한화이글스 선수단의 패기와 승부욕, 실책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이기고자 하는 모습은 확실하게 바뀌었다.
그렇게 김성근 감독은 한국야구계를 떠났다.
김성근감독에 대한 평가는 명과 암이 갈린다.
김성근 감독이 과다한 훈련량과 혹사의 감독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선수들 입장에서는 기회를 많이 주었던 감독이라고 기억되기도 하며,
꼴찌의 선수단을 리빌딩하여 리그 정상위권 팀으로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야구의 엄청난 훈련량으로 실력을 다짐과 동시에 정신력까지 강조한 감독이기도 하다.
승부사 기질을 통해 승리를 쟁취하는 모습을 보이는 감독이지만,
상대팀에겐 재미없는 야구를 선사한 감독이기도 하다.
야구팬들중 김성근 감독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지만, 박현준, 김광현, 이승엽, 정우람, 정대현 등 수많은 선수들에게는 아직도 인망이 높다. 박현준은 LG트윈스시절 선수로서 존경할 수 밖에 없던 사람으로 치켜세우며, 이승엽은 김성근의 여론이 좋지 않던 시절 그를 두둔하며 논란이 되기도 했따. 정대현은 롯데자이언츠로 이적하면서 백넘버를 38으로 새기며 김성근 감독을 기억하였다.
김성근 2646경기 1,384승 60무 1,202패
23시즌 3회 한국시리즈 우승, 정규리그 우승을 거두었고,
김성근이 부임하던 팀에 늘 관중이 쏟아졌다.
태평양, 쌍방울, SK, 한화 이글스까지.
이제 그는 야인의 길을 걸으며,
JTBC 최강몬스터즈 은퇴한 선수들이 있는 예능팀에서 감독직을 맡게 되었다.
최강몬스터즈의 감독직을 맡으며 팀의 선수들 중에서 좋은 지도자가 나오길 바란다는 인터뷰를 했다.
이제 그이 팬으로서 나는 김성근 감독도 야구로 힘들어하지 않고, 야구를 즐기며 생을 보냈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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