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야구 알아보기/야구역사 알아보기

[야구역사] 1989년 태평양돌핀스의 돌풍. 김성근 감독의 오대산극기훈련과 인천야구의 첫 가을야구.

by 리듬을즐기는표범 2022. 11. 28.
728x90

태평양돌핀스는 어떤 팀이었을까?

태평양 돌핀스는 1988년부터 1995년까지 약 8년간 존재했던 팀이다.

 

연고지는 인천광역시, 경기도, 강원도, 이북5도를 연고로 했던 팀이다.

인천구장이 제1구장이고, 춘천구장이 제2구장이었다.

그리고 수원구장이 완공되면서 제2구장이 춘천구장에서 수원구장으로 변경되었다.

연 6경기이상을 제 2구장에서 경기했다.

 

청보핀토스를 50억원에 인수하면서 팀명을 변경하여 탄생하였다.

 

 

인천광역시를 연고로 한 팀들 중에서 삼미슈퍼스타즈, 청보핀토스를 거쳐서 인수된 팀으로

인천의 야구팬들에게 많은 기대를 모았던 팀 중에 하나이다.

또한 인천연고팀 역사상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과 한국시리즈 진출의 성과를 낸 팀으로

인천야구팬들 중, 어린시절을 보낸 3040들에게 익숙한 추억의 팀이기도 하다.

 

오늘 소개할 내용은 그중에 1989년 태평양돌핀스의 돌풍에 대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태평양돌핀스는 1988년 창단 후 

OB베어스에서 임기가 종료된 김성근 감독을 영입하고, 투자를 시작하며 팀 개편에 들어간다.

기존 코치들을 물갈이 할 계획이었던 태평양 돌핀스는 김성근 감독의 요청에 따라 

팀 코치진들의 전면개편에 나섰다.

 

오대산 극기훈련을 거치고, 신인 3인방트리오 박정현, 최창호, 정명원이 팀 62승 중 40승을 합작하며, 팀의 성장에 기여한다.

 

 

 

 

1989년 태평양 돌핀스 오대산 극기훈련

굉장히 유명한 일화중에 하나가 태평양돌핀스의 오대산 극기훈련이다.

1989년 1월 김성근 감독은 오대산으로 선수단 전원을 이끌고 극기훈련에 나섰다.

 

오대산은 강원도 강릉시와 평창군 홍천군 사이에 위치해있는 산이다.

이때는 오키나와 캠프나 호주 미국 애리조나 캠프 등 스프링 캠프를 가는 현 시절과 달랐다.

 

이 당시 

태평양돌핀스 선수단의 훈련은 야구와는 전혀 상관없는 훈련들이었다. 6박 7일간의 훈련이다.

유격훈련을 가미한 혹학기 훈련처럼 느껴진다. 물론 군대에서 우리가 즐기는 훈련보다 강도가 쎄보인다.

 

 

이러한 유례없는 훈련에 

태평양 구단은 반색하고 이 훈련에 대하여 반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은 선수단에게 참가비+식사용품+준비물+취사도구 등을 선수가 개별적으로 준비하도록 하였다.

 

 

두꺼운 얼음이 얼어있던 산골 얼음계곡에 사람의 몸만 들어 갈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놓고

냉탕 15초 입수 훈련, 10km 산악구보, 50km 산악행군, 맨발 눈길 걷기, 극기체초, 맨손 짐승 사냥 등을 진행한다.

당시 오대산은 영하 15도 이하로 내려가는 기온이었고, 눈도 1미터 이상 쌓였으나,

새벽 4시에서 시작하여 한밤중이 될 때까지 훈련은 계속되었다. 선수들은 직접 버너로 밥을 해먹는 등 온갖고생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선수들은 이 훈련에 굉장한 회의감을 갖고 불만이 많았다.

주장 김일권을 "이러한 훈련이 시즌 야구 성적과 무슨상관이 있습니까?"

포수 김동기는 "칼이라도 있으면 감독을 찔러버리고 싶은 마음이다."

재일교포 출신 선수 김신부는 "연봉 1억원을 줘도 싫다. 당장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다." 라는 등의 반발이 많았고

이 훈련이 끝나면 죽인다는 등 굉장한 거부감이 심했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은 2군행이라는 강경수를 두면서, 선수단이 훈련에 참가하도록 강요하였다.

김성근은 이과정에서 팀을 만들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김동기는 KBO리그 40주년 인터뷰에서

"야구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훈련"이라며 웃었다고 한다.

"정신력과 팀워크 강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해 태평양 돌풍에 어느 정도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1989년 시즌 시작 후 경기에 못나가는 선배들도 벤치에 앉아서 하나가 되었고, 후배들이 실수해도 격려와 응원을 했다."

"그 이전까지느 못치면 비웃음과 패배의식에 물들고 자기 개인기록과 살길만 챙겼던 것과는 달리, 행군하며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끌어주며 팀이 하나로 뭉쳤다."

 

오대산 극기훈련

 

이 과정에서 만년 꼴찌 인천야구팀은 패배주의에 찌들어 있던 선수단의 정신을 개조시키고 자신감을 높였다는 평가도 받는다. 그리고 이 훈련을 한 해인 태평양돌핀스는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OB베어스와 삼성라이온즈가 극기훈련과 혹한기 훈련을 하게 하는 영향을 주게 한다. 야구판 전체에 극기훈련이 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OB베어스 해병대캠프 극기훈련, 삼성라이온즈 혹한기 훈련 한해 2회. 팔공산 공수부대 입소 등으로 코치도 병원에 실려가는 등의 엄청난 고강도의 훈련을 했다.

 

그러나 훗날 극기훈련은

정신력을 늘리는 하지만,  잔부상을 많이 일으키고 실보단 허가 많다는 평가를 받다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SK와이번스에 부임한 김성근 감독역시 오대산 극기 훈련에 대하여 부상위험이 높았기 때문에 하지 말았어야할 훈련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태평양돌핀스가 변화를 일으키게 한 원동력임은 충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성근 감독은 오대산극기훈련과 같은 극기훈련을 추후에는 하지 않았으나, 정신교육은 지속적으로 했다고 한다. SK와이번스와 한화이글스에서도 꾸준히 정신교육을 하였다.

 

 

 

 

1989년 태평양돌핀스 정규시즌! 돌풍의 시작!

1989년 시즌이 시작하고 

시즌개막의 첫경기인 잠실 MBC청룡과의 경기에서 김신부와 양상문의 호투로 4-3의 스코어를 기록하며

개막전 승리를 장식하며 시작하였다.

 

승리로 시작하는 태평양 돌핀스

 

그리고 첫 5경기 4승1패를 기록하며 산뜻하게 단독 1위를 기록한다.

시즌 마지막까지 총 65승 4무 54패(승률 0.533)을 기록하며, 정규시즌 3위를 기록한다.

인천야구의 최고 승률을 기록하였고,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된다! 이해에 준플레이오프가 생겼다.

 

박정현(19승), 정명원(11승), 최창호(10승)을 앞세워 신인 3인방 트리오의 강함을 보여주었다.

박정현이 인천잠수함 투수의 원조라고 할 수 있겠다.

향후 소방수로 활약한 정명원, 에이스 최창호까지 전부 트로이카 인천 출신 신인으로 활약한다.

 

1989년 가을야구 진출 태평양돌핀스 김성근 감독과 인천야구의 봄

1989년 시즌은

1위 빙그레 이글스

2위 해태 타이거즈

3위 태평양 돌핀스

4위 삼성 라이온스

 

엄청난 훈련량의 김성근 야구

 

로 태평양 돌핀스는

1988년도 8개구단 7위팀에서

1989년도 3위라는 성적을 기록하며, 정규시즌을 마친다.

기존에 인천야구팀은 승률 0.188을 기록하는 등 역대 최악의 성적을 인천시민에게 안겨주면서 늘 실망만을 주었었다.

그러나 태평양이 인천야구의 봄을 가져온 것이다.

 

태평양 돌핀스의 분투에 홈관중수는 1988년 16만여명이었으나 1989년에는 42만여명에 달했다. 당시 도원구장의 관중수용규모는 12,500석이었는데 평귝 7000명 가까이 관중이 들어왔떤 것이다. 1위팀이었던 빙그레의 홈 관중수가 29만명이었는데 그보다 1.5배가깝게 많은 관중수를 기록했다. 그만큼 인천시민들은 다시 야구를 사랑하고 있었다.

 

 

 

 

3위 삼성라이온즈, 4위 태평양돌핀스 준플레이오프! 14회까지의 인천 모두가 기억할 호투!

1989년 10월

1차전 도원구장, 2차전 대구시민구장, 3차전 도원구장에서 경기가 치뤄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레전드의 경기로 기억되는 

삼성라이온스와 태평양돌핀스의 1989년 준플레이오프 1차전 10월 8일 도원구장에서의 경기이다.

 

1만2500석은 당연 매진되었고, 도원산 언덕에서 야구를 보는 관중들, 야구장 옥상으로 올라 야구를 보는 관중들 등

야구를 보기위한 인천팬들의 열망은 극에 달아올랐다.

 

 

이날 선발투수는 

태평양 돌핀스 박정현 언더핸드 투수

삼성 라이온즈 성준 좌완투수의 대결이었다.

 

두명의 투수 역시 100구가 넘는 볼을 던지면서 9회까지 

상대팀의 타선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아놨다. 

성준은 연장 10회말 132구의 호투를 던지며 당시 삼성라이온스 사이드암 투수인 김성길과 교체되었다.

 

하지만 박정현은 10회, 11회, 12회, 13회, 14회초에도 마운드에 계속 올라왔다.

14회까지 박정현의 투구수는 172구로 삼성 박충식과 김성길이 180구를 넘겨던지기 전까지 최다투구의 기록의 소유자였다.

 

당시 포수 김동기의 말에 따르면, 싱커와 직구의 구속이 비슷하여,

타자들이 삼진보다는 빈타를 치면서 속절 없이 당했다고 표현한다. 2차전은 최창호, 3차전은 정명원이 선발투수로 내정되어있었는데 박정현을 대체할 수 있는 투수가 없었다.

 

대망의 연장 14회말 김일권의 중전안타와 여태구의 좌전안타에 이어, 김동기의 김성길의 2구를 숭의동 도원야구장의 우중간 담장을 넘기며, 끝내기 3점 쓰리런 홈런으로 영광의 포스트시즌 첫 승리를 껴안았다.

인천시민들에게 영원히 기억되는 레전드 경기중의 하나이다. 포스트시즌 사상 최초 끝내기 홈런 드라마였다.

2022년 김강민의 한국시리즈 5차전 끝내기 홈런을 보며 인천시민들이 이날을 회상했을 것이다.

물론 2009년의 한국시리즈 7차전 기아 나지완의 홈런을 보면서 아쉬움에 회상했던 것 처럼...

 

 

대한민국 역사상 첫 준플레이오프의 승리투수로 박정현이 기록되었고, 김동기가 첫 쓰리런 끝내기 홈런을 기록한 당사자가 되었다. 박정현은 50명의 타자를 상대하며, 삼진 7개와 볼넷 3개, 피안타 8개를 기록하며 역사상 최다이닝 완봉승을 거두는 투수로 기록되고 있다.

 

이날밤 인천에는 연안부두 노래가 끊임없이 울려퍼졌다고한다.

 

 

2차전에서는

태평양 돌핀스 최창호와

삼성라이온스 최동원이 선발투수로 나왔다.

84년 포스트시즌 이후 첫 가을야구였지만, 밀어내기로 2점을 내주고 내려왔다.

 

그러나 삼성라이온스는 김용국의 만루 홈런으로 6회 역전에 성공하며 

포스트 시즌 11연패를 마무리하며 기사회생하였다.

 

3차전에서는 

태평양 돌핀스 정명원과

또다시 나온 삼성라이온스 최동원의 선발투수 대결이었다.

 

 

최동원이 2일 연속 포스트시즌 선발에 나온것을 보면, 이때도 역시 야구선수에 대한 과학적인 부분이 많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3회 태평양돌핀스의 이광길의 솔로홈런, 4회 류중일의 동점 적시타,

4회에 박정현이 또다시 올라왔다. 1차전에 173구를 던졌던 박정현을 대체할 사람이 없었음.

그리고 9회 2사까지 아웃카운트를 잡고 내려왔다.

 

그리고 10회의 연장에 태평양돌핀스는 베태랑 양상문을 꺼내들었고,

삼성라이온스는 루키 유명선이 올라왔다.

10회 삼성라이온스는 무사 3루의 위기에 몰리자 만루작전으로 베이스를 꽉채웠따.

그리고 태평양돌핀스의 곽권희는 전진수비를 하고 있던 삼성라이온스의 중견수 뒤쪽 펜스를 때리는 장타를 날리며

연장 혈투 끝에 승리를 거두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

 

정규시즌에 단 23개의 안타만을 기록한 곽권희는 이날은 인천의 영웅이었다.

프로야구 출범이후 줄곧 꼴찌만을 기록했던 인천야구는 이날 새롭게 다시 태어났다.

역대 준플레이오프 중 가장 극적인 승부로 기록되고 있다.

 

공포의 외인구단 태평양은 당시 최강의 전력 해태타이거즈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고 3연패로 포스트시즌을 마감했다.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불리던 89년 태평양돌핀스는

야구를 사랑했던 인천야구팬들에게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