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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준은퇴] 인생은 이호준처럼! NC다이노스의 이호준은 누구인가?

by 리듬을즐기는표범 2017.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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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이호준처럼"이라는 단어가 한국프로야구계를 들썩거리게 했었다.

 

투수는 선동렬, 타자는 이승엽, 야구는 이종범, 인생은 이호준이라는 명언은 한국야구계에서 오래도록 남아있을 것이다.

이호준 선수는 2017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고 마지막 시즌을 보내고 있다.

 

이호준 선수는 한국프로야구에서 어떤 선수였고, 어떻게 많은 별명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인생은 이호준처럼! 이호준 은퇴...그는 누구인가?


 

 

<이호준이 가장 오래뛰었던 SK와이번스와 문학구장에서의 마지막 경기를 치룬 2017년 8월 9일>

 

 

이름 : 이호준

출생 : 1976년 2월 8일 (광주광역시)

학력 : 광주중앙초-충장중-광주제일고

포지션 : 1루수, 지명타자 (우투우타)

입단 : 1994년 고졸 연고구단 자유계약(해태 타이거즈)

우승기록 : 1996, 1997(해태), 2007, 2008, 2010(SK)

 

 

이호준은 해태타이거즈에 입단하여 SK와이번스를 거쳐, NC다이노스에서 은퇴를 하게 되었다. 2017년 은퇴를 끝으로 장장 24시즌을 KBO리그에서 보낸 역대 최장 기록이다.

 

SK와이번스에서 가장 오랜기간 선수생활을 했던 이호준에게 인천문학경기장은 많은 추억이 있는 장소일 것이다. 2017년 8월 9일을 마지막으로 문학구장과 결별하는 그와 헤어짐이 너무나도 아쉽다.

 

이호준의 프로입단과 프로에서의 생활 그리고 성적, 별명의 어원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차례로 알아보도록 하자

 

 

이호준의 프로야구 입단

 

1993년 말에 고졸 선수 스카웃을 위해서 대학과 프로구단간의 갈등이 많았다. 연세대에 진학하기로 되어있었던 김재현 선수는 LG 스카우트가 연세대학교의 일본 전지훈련지를 잡입하여 계약을 이끌어 내는 등 많은 마찰들이 있었다. 이호준 역시 마찬가지로 김재현처럼 연세대학교에 가등록되어있던 상태였다. 하지만 이호준 역시 연세대학교 기숙사에 해태타이거즈의 스카우터가 잡입하여 계약을 이끌어내었다.

 

 

이호준의 해태타이거즈 시절 (1994 ~ 1999)

 

<해태타이거즈 시절 투수로 활약했던 이호준 선수>

 

이호준은 광주제일고(現 광주일고) 출신으로 선동열, 김기태, 이강철, 이종범 등의 선수를 배출한 야구 명문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던 자격은 투수 자격으로 입단하였다. 하지만 1994년, 1995년 시즌 성적이 처참하였고, 부상까지 입은 탓에 1996년에 타자로 전향하게 된다.

 

투수로 지내던 시절 LG소속이었던 김재현에게 20홈런을 허용하며 20-20클럽에 가입하는데 도움을 주는 등의 성적이 말이 아니었다. 8경기 16피안타 7피홈런 방어율 10.22를 기록하였다. 16개의 피안타중에서 7개가 피홈런이었던 시절이다.

 

1996년 타자로 전향한 이후 첫해에는 뚜렷한 성적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하지만 김성한 타격코치가 해태타이거즈에 부임한 이후 지옥 훈련을 통해서 1997년에는 54경기 밖에 출장하지 않았고, 126타수밖에 기회가 없었지만 8개의 홈런을 기록하는 등 타격에 있어서 재능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1998년 이윽고 해태 타이거즈의 4번타자로 발돋음하며 0.303타율에 19홈런, 77타점을 기록하면서 해태타이거즈의 중심으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이종범이 떠난 자리에 이호준은 해태타이거즈의 중요한 선수였다. 1999년도에도 0.276타율에 16홈런으로 활약하였다. 하지만 1999년도에는 워낙 팀내에 활약이 뛰어났던 선수가 많아서 빛을 보지 못하였다.

 

 

SK와이번스로의 트레이드, 이호준의 전성기 시작 (2000 ~ 2012)

 

<SK와이번스의 이호준 선수의 활약>

 

해태타이거즈의 투수진의 붕괴로 인해 당시 막 창단한 SK와이번스의 투수 성영재와 해태 타이거즈의 이호준이 트레이드로 유니폼을 바꿔입었다. 해태 타이거즈의 당시 감독이었던 김응룡이 이호준을 투수로 전향시키려 하였으나 이호준이 그것을 거부하였고, 이로 인해 트레이드로 쫓겨나다시피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2000 ~ 2001

2000년도에는 손목 부상으로 시즌아웃이 되어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였고, 2001년에도 부진하였다.

 

2002 ~ 2003

그러나 2002년 이윽고 SK와이번스의 중심타자로 우뚝서기 시작하였다. 26개의 홈런을 쏘아 올리면서 자신의 입지를 다진 이호준이었다.

2003년 36홈런 102타점을 기록하면서 홈런 4위에 올랐는데, 이때의 성적이 지금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했던 것은 이승엽 56호 홈런, 심정수 53홈런, 마해영 38홈런, 양준혁 33홈런의 기록들이 즐비한 대타자들 사이에서 경쟁했던 것이었다.

 

2004 ~ 2007

2004년에는 30홈런 112타점으로 2년연속 30홈런 100타점 기록을 세우면서 타점왕에 오르기 까지 하였다. 2004년부터 이호준은 로또준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로또준의 첫 시초는 로또가 터진것처럼 타점을 터뜨린다는 의미의 좋은 의미로 시작되었다.

 

2006년에는 입영을 하였다.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하던 도중 무릎의 문제로 의가사제대하면서 2007년에 팀에 복귀하게 된다. 그리고 2007년 SK와이번스가 우승을 하게되면서 우승의 공신으로 우뚝서게 되었다.

 

그리고 2008년시즌을 앞두고 4년 34억원이라는 당시의 엄청난 금액으로 FA계약을 성취하게 된다.

 

<SK와이번스 시절의 이호준의 모습>

 

2008 ~ 2010

2008년 시즌 SK와이번스는 압도적으로 리그 1위를 한다. 하지만 팀의 4번타자였던 이호준의 성적은 처참했다. 무릎부상으로 인해서 시즌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제대로 경기에 뛰지도 못하면서, 없는게 도움이 될정도로 존재감이 없었다.

 

2009년 시즌에는 0.298 16홈런, 55타점을 기록한다. 준수한 성적처럼 보이지만 팀내 4번타자로서의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서 SK팬들은 아쉬움이 컸다. 또한 이호준이 4번타자로서 날린 승리에 대한 기회와 각종 실책들까지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2009년 2위를 한 것의 원인이 아니냐며 미워하기도 하였다.

 

2010년의 후반기부터는 팀내 4번타자로서의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다. 대타로 나올때마다 안타를 치면서 팀에 활기를 불어넣어주었고, 무엇보다 롯데자이언츠 고원준 투수에게 노히트노런을 당하고 있을 때 안타를 쳐내면서 팀이 굴욕을 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아슬아슬한 리드를 이어나가고 있을 때 타점을 쳐내면서 해결사 역할을 도맡았다.

 

<SK와이번스시절 홈런을 쳐내는 이호준의 모습 로또1등>

 

 

2011 ~ 2012

2011년도에는 다시 로또준으로 돌아왔다. 주자가 있을 때 홈런을 치면 로또 1등, 안타를 치면 로또2등, 희생타는 로또3등, 혼자 아웃되면 로또 4등, 병살타는 당첨 실패라는 말이 나돌았을 정도다. 이호준은 승부가 기울어져있을 때 경기를 뒤집는 것이 어려운 경기에서 날라다녔다.

 

2011년 김성근 감독이 경질되었을 때 SK와이번스 팬들이 현수막 시위를 하였는데, 상대팀에게 창피하다는 발언을 하였다. 그리고 현수막을 거둬달라는 요청을 하였다고 한다. 팬들은 정말 선수단이 그랬냐면서 믿을 수 없었지만, 이호준이 그 중심에 있었다는 이야기에 이호준이 비난받기도 하였다.

 

2012년 FA로이드를 맞다. 0.300 18홈런 78타점

2012년에는 FA바로 직전 시즌이었다. 갑자기 엄청난 활약을 하였다. 한국프로야구 통산 역대 최초 한경기 6연속 볼넷까지 기록하였다. 타율도 팀내에서 유일하게 3할이 넘었고, 9월까지 18홈런을 치면서 8월에는 리그 MVP에 등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FA로이드를 맞으며 FA를 통해 NC다이노스로 이적을 하게 되었다.

 

아쉽게 이호준은 이적을 하게 되었지만 13시즌동안 SK와이번스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활약은 성적을 넘어 외적인 부분에서도 많은 영향력을 차지하였다. 야구계에서 펄녀(마담)라고 불리는 사람이 여자와 야구선수간의 결혼을 주선하면서 많은 선수들의 성적이 하락하였는데,

SK와이번스가 전성기를 이루던 시절, 펄녀의 진입을 막으면서 야구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주었던 주인공이 이호준이라고 한다.

 

주장으로서, 그리고 정신적 지주로서 SK와이번스에서의 이호준의 모습은 진짜 남자였다.

 

 

NC다이노스로의 이적, 로또준 인생은 이호준처럼! (2013 ~ 2017)

 

 

<NC다이노스의 영원한 캡틴 이호준>

 

이호준은 3년 20억으로 NC다이노스로 이적을 하게 되었다. SK팬들 입장에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소식이었다.

SK가 2년 12억원이라는 조건을 내걸었었기 때문에 NC다이노스의 조건이 더욱 맞기도 하였고, NC에서 이호준을 격렬하게 원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SK와이번스는 창단이후 사랑을 받아왔던 프랜차이즈스타를 잃게 되었다.

 

거기에다가 FA를 통해 NC에서 좋은 활약을 펼쳐주었다. NC다이노스는 신생팀으로서 팀내에 경험많은 선수를 얻었다는 조건과 우승경험까지 있는 이호준이 반드시 필요하던 상황이었고, 베테랑 타자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SK입장에서는 유망주를 받을 수 없었던 NC다이노스의 신생팀 조건에 따라서 현금으로 밖에 돌려받지 못하는 아쉬움만 얻게 되었다.

 

NC다이노스로 이적하면서 주장을 맡게 되었는데 타선의 중심을 잡아주며, 해결사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나성범-테임즈-이호준으로 이어지는 무시무시한 타선을 구축하면서 점차 NC다이노스는 성장하게 된다. 2013년부터 2014년까지 팀의 주장자리를 맡으면서 신생팀의 자리를 잡아준 이호준은 NC다이노스의 아버지역할을 톡톡히 해내면서 아버지 + 이호준 = 호부지라는 별명도 얻게 되었다.

 

2016년에는 불혹의 나이로 0.298의 타율에 21홈런 87타점을 기록하면서 건재함을 과시하였다. 시즌이 끝나면서 FA자격을 얻었으나 신청하지 않고 NC다이노스에 잔류하면서 2017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그리고 2017년 마지막 이호준의 해가 서서히 저물고 있다.

 

 

로또준, 왜 인생은 이호준처럼 이라는 말이 되었을까?


 

 

<인생은 이호준처럼 NC다이노스의 이호준 티셔츠>

 

 

야구에서 가장 유명한 명언은

 

"투수는 선동렬, 타자는 이승엽, 야구는 이종범, 인생은 이호준처럼" 이라는 말이 있다. 왜 이러한 명언이 야구계에서 유명한 말이 되었을까?

 

별명의 원인과 이야기 - 로또준, 인생은 이호준처럼

 

로또준

 

애초에 이호준은 로또준이라고 불렸다. 타점을 쓸어담는 기계라는 의미에서 좋은 의미로 쓰였다. 하지만 SK와이번스에서 활약이 좋지 않을 때가 많으면서 로또준이라는 별명의 의미가 퇴색되기 시작하였다. 로또당첨처럼 기회에 타점을 내는 날이 매우 적다는 의미의 별명이었다. 아무리 좋지 않은 별명이었을지라도 SK와이번스팬들에게 그만큼 사랑을 받았다.

 

 

앞서 언급했지만 주자가 있을 경우, 홈런을 치면 로또1등, 안타를 치면 로또2등, 희생타를 치면 로또3등, 혼자만 아웃되면 로또4등, 병살타는 당첨 실패라는 별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로또준의 어원이다.

 

인생은 이호준처럼

 

이호준의 야구성적은 그래프가 위아래로 심하게 요동치고 있다. 잘하다가 못하다가를 반복하였다. FA직전시즌마다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면서 FA를 성공적으로 계약을 따내었는데, FA직전에 잘하는게 정말 중요하다를 몸소 실천으로 일깨워준 장본인이 이호준이었다.

 

 

SK와이번스시절 07년도 0.313 타율에 21홈런 65타점으로 SK와이번스의 4번타자역할을 톡톡히 해내었고, 팀을 우승으로 이끈 주역으로서

이듬해 4년 34억원이라는 로또를 터뜨렸다. 이때 인생은 역시 이호준처럼 야구를 저렇게 해야한다는 평가가 많았다.

 

그러나 2008년 다시 하강곡선을 그리면서 인생은 이호준처럼 살아야하는 것인가라면서 조롱섞인 표현이었다.

 

 

NC다이노스로 FA를 통해 이적하기 바로 이전시즌이었던 2012년 0.300 18홈런 78타점으로 2010년과 2009년에 비해서 급격히 월등한 성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FA를 통해 3년 20억으로 이적을 통해 FA를 2번이나 성공한 선수가 되었다. 인생은 역시 이호준 처럼이었다.

 

 

하지만 FA를 통해 NC다이노스로 이적하면서 좋은 활약을 펼쳐주었다.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NC다이노스에서 성적과 팀을 다져가는데 큰 역할을 해냈다. 야구는 양준혁처럼, 인생은 이호준처럼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양준혁처럼 뛰어나고 화려한 성적을 내진 못했지만, 화려하지 않아도 꾸준한,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가치가 높아지는 선수라는 존경심을 담은 별명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호준 부인의 응원모습> 


 

그리고 이호준이 양준혁과 비교되는 큰 이유중에 하나가 이호준의 아내가 상당히 미인이다. 양준혁보다는 기록에서 조금 뒤쳐지지만 미인과 결혼에 성공한 이호준이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라는 것이다.



<이호준 아내 인터뷰 영상>


 

 

 

이호준은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기록이 없지만 사랑의 골든글러브는 성취한 진정한 승리자이다.

 

이호준의 인생을 보면서 인생이 아름다움을 야구를 사랑하는 팬들은 느낄 수 있다.

 

 

 

 

이호준의 역대 성적표

 

 

투수로서의 이호준 성적

 

타자로서의 이호준 성적(2017.08.10 현재 / 통산성적은 16년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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