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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야구 역사의 진짜 시작은?|인천 영화학당과 황성 YMCA야구단

by 리듬을즐기는표범 2026.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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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야구는 어디서 시작됐을까? 많은 사람들이 1905년 황성 YMCA 야구단이 한국 야구의 시작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사실 그보다 6년 앞선 1899년, 인천에서 이미 야구 경기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 야구의 진짜 시작점은 인천이다. 인천 야구팬으로서 이건 정말 자부심 가질 만한 사실이다. 야구의 시작도 인천, 지금도 SSG 랜더스가 인천을 지키고 있다. 인천은 한국 야구의 원점이자 현재진행형이다.

 

오늘은 한국 야구 120년의 역사를 풀어본다. 1899년 인천 영화학당의 첫 기록부터, 1905년 필립 질레트의 황성 YMCA 야구단, 미군부대 야구공으로 시작한 가난한 야구단의 모습, 1912년 일본 와세다대 원정, 그리고 2002년 YMCA 야구단 영화 까지. 야구팬이라면 한 번쯤 알아두면 좋은 이야기들이다.

 

한국 야구 시작 인천 역사
1928년 고려야구단이 동아일보 인천지국 앞에서 촬영한 모습. 한국 야구의 시작점은 인천이었다 인천 야구 한 세기 자료.

 

 

 

1899년 인천 영화학당: 한국 야구의 진짜 출발점

후지야마 후지사와의 일기에 남은 "베이스볼"

한국 야구의 공식 시작은 1905년이다. 그런데 그보다 6년 앞선 1899년, 인천에서 이미 야구를 했다는 기록이 발견됐다.

바로 인천 영어야학회(현 영화초등학교, 영화여상, 인천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일본인 학생 후지야마 후지사와의 일기장이다. 그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베이스볼이라는 서양식 공치기를 했다."

 

단 한 줄. 하지만 이 짧은 문장이 한국 야구사를 6년 앞당긴 결정적 단서다. 1905년 황성 YMCA 야구단이 공식 기록이지만, 실제로는 1899년 인천에서 이미 베이스볼이 굴러다니고 있었다는 의미다.

 

영어야학회는 인천일보를 보면 인천고등학교의 전신이라고 나와있고, 경기일보를 보면 영화초등학교의 전신이라고도 하고, 어디가 진짜인지는 사실 알 수 없지만 인천이 최초인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러나 역사로 보나 남아있는 기록들로 보나 영어야학회가 인천영화초등학교의 전신으로 보는게 정석이다. 아마 인천일보 기자님이 쓰실때 잘못쓴게 아닐까 싶다.

 

한국 야구 역사가 인천에서 시작된 이유: 최초의 개항장

한국 야구가 인천에서 먼저 시작된 건 우연이 아니다. 인천은 1883년 개항한 한반도 최초의 개항장 중 하나였다. 외국인들이 가장 먼저 들어오는 도시였다.

 

미국·영국·일본 등 외국 공관과 외국인 거류지가 형성되었고, 미군도 주둔했다. 자연스럽게 서양 문화와 스포츠가 가장 먼저 전파되는 도시가 됐다. 야구뿐 아니라 축구도 마찬가지다. 1882년 영국 군함 플라잉피쉬호의 수병들이 인천 웃터골운동장에서 축구 경기를 한 것이 한국 축구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야구도 축구도 모두 인천이 출발점이다.

 

영화학당의 역사: 1892년 미국 선교사가 세운 학교

한국 야구의 첫 기록이 남은 영화초등학교는 어떤 학교일까?

영화학당은 1892년 4월, 미국 여선교사 존스 부인(Mrs. G. H. Jones)이 인천 중구 내동의 내리교회에서 설립한 학교다. 인천 지역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이고, 기독교 미션스쿨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가 시작된 영화초등학교의 모습영화초등학교의 현재의 모습
기록상으로 우리나라 최초 야구가 시작된 운동장의 모습이 들어있는 사진이다.

연도 사건
1892년 4월 존스 부인이 내리교회에 영화학당 설립
1899년 인천 영어야학회 베이스볼 기록 (한국 야구 최초)
1903년 9월 경동 싸리재로 교사 신축 이전
1910년 3월 현재 위치(인천 동구 창영동)로 이전 (무형문화재 39호)
1996년 3월 영화초등학교로 교명 변경

 

 

 

개교 당시 학생은 단 1명이었다. 1905년 47명으로 늘었고, 1910년 인천 동구 창영동에 벽돌 2층 교사를 신축해 지금까지 그 자리에 남아 있다. 한국 야구가 처음 굴러다닌 그 자리. 인천 야구팬이라면 한 번쯤 가볼 만한 의미 있는 장소다.

 

초등학교와 붙어있기 때문에 반드시 전화로 확인하고 방문하길 추천한다. 09:00~17:00까지가 방문가능시각이며, 032-770-6923이 관리전화번호이다.

 

 

1905년 황성 YMCA 야구단: 한국 야구의 공식 시작

필립 질레트 선교사 황성 YMCA 야구단 창설자와 YMCA야구단 맴버들
YMCA야구선수단과 오른쪽 아래 한국 야구의 아버지 필립 질레트 선교사

 

위 이미지는 한국야구위원회가 보관하고 있는 한국 야구의 아버지 길례태씨의 사진이 담긴 소중한 자료다. 

 

미군 캐치볼을 신기하게 보던 조선인들

1901년,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Philip L. Gillett, 한국명: 길례태)가 한국 YMCA 창설 책임자 신분으로 한국에 왔다. 어느 날 그는 YMCA 임시건물(인사동 태화관) 앞에서 흥미로운 광경을 봤다.

미군들이 캐치볼하는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조선인들의 모습이었다. 그 순간 질레트는 결심했다.

 

"조선인들에게 야구를 가르쳐야겠다."

 

그렇게 1905년 황성 YMCA 야구단이 창단됐다. 한국 야구의 공식 시작이다. 사실 야구는 선교를 위한 도구였다. 청년들에게 건전한 운동을 가르치며 자연스럽게 기독교 정신을 전파하려는 의도였다.

 

한국 최초의 공식 경기: 1906년 vs 덕어학교

기록상 한국 최초의 공식 야구 경기는 1906년 2월 11일에 열렸다. 장소는 훈련원 공원, 경기는 황성 YMCA 야구단 vs 덕어학교였다.

 

결과는 사실 좀 처참했다. 첫날 1·2·3차전 모두 덕어학교 승리, 둘째 날 1·2차전도 덕어학교 승리. 황성 YMCA 야구단은 5전 전패로 첫 경기를 마쳤다. 야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이 5번의 패배가 한국 야구 100년 역사의 시작이 됐다.

 

선교사 질레트의 보고서: 12월에도 경기를 했다

초창기 한국 야구의 인기는 생각보다 뜨거웠다. 질레트의 보고서에 따르면 매달 6~9회의 야구 경기가 열렸다. 심지어 12월 한겨울에도 3경기를 치를 정도였다. 영하의 날씨에 맨손으로 야구를 했다는 의미다. 지금 보면 상상도 안 되는 열정이다.

 

미군부대 야구공과 맨손 수비: 가난한 야구단의 추억

초기 한국 야구는 정말 열악했다. 야구는 시작했는데 장비가 없었다.

 

한국야구에서 가장 오래된 야구 기록 사진
한국야구사에서 가장 오래된 야구하는 기록 사진이다.

야구공은 미군부대에서 받아 썼다

조선에서는 야구공을 만들 수 없었다. 미국에서 수입하거나, 미군부대에서 쓰고 버린 공을 받아서 재활용해야 했다. 공 하나하나가 보물이었다. 실밥이 다 터질 때까지, 가죽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썼다.

 

선교사들이 미국에서 공을 가져오는 게 귀한 보급품이었다. 야구공 하나 받으면 야구단 전체가 환호했다고 한다. 지금은 한 경기에 100개씩 쓰는 야구공이, 그때는 한 개로 며칠을 썼다. 시대가 정말 많이 변했다.

 

글러브가 없어서 맨손으로 수비했다

더 충격적인 건 글러브가 없었다는 점이다. 야구공은 어떻게든 구했지만 값비싼 글러브는 구하기가 더 어려웠다. 그래서 어떻게 했을까?

 

맨손으로 수비를 했다. 글러브를 낀 사람보다 맨손으로 공을 잡는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한다. 시속 100km 가까이 날아오는 단단한 야구공을 맨손으로 받았다는 이야기다. 손이 부어오르고 멍이 들고 피가 나도 야구를 했다. 정말 야구를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규칙도 엉성했던 초기 야구의 코미디

규칙도 제대로 정착되지 않아서 지금 보면 황당한 장면이 많았다.

  • 대주자 시스템: 타자 옆에 잘 뛰는 주자를 미리 배치해서, 타자가 공을 치면 타자 대신 주자가 1루로 전력 질주했다. "타자는 치기만, 뛰기는 다른 사람이"라는 분업 시스템이었다.
  • 홈플레이트 점령 작전: 포수가 공을 잡지 못하도록 타자가 양다리를 벌려 홈플레이트 위에 서 있었다. 포수가 와도 못 비켜준다. 그야말로 진지한 코미디.
  • 인원 부족: 9명 포지션이 다 채워지지 않아서 내야 3명, 외야 2명만 세우고 경기를 진행하기도 했다.(동네야구)
  • 심판 부족: 처음에는 질레트와 선교사들이 직접 심판을 봤다. 나중에 김영제가 한국 최초의 정식 심판으로 활약했다.

 

지금 보면 코미디지만, 이런 엉성한 시작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어마어마한 스포츠 산업인 KBO가 만들어졌다. 

어릴적 야구를 친구들과 할때 6명이서 두팀으로 나눠서 경기하고 했던 기억이 있다. 조선의 야구도 첫시작이었던 만큼 다를바 없었을 것이다. 야구라는 스포츠보다 먹고사는게 더 큰 문제였을 텐데 장비도 부족하고 인원도 부족한 미미한 시작이었지만 지금은 1000만 관중의 KBO를 만들어냈다.

 

1912년 와세다대 원정: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 같았다"

 

1912년 와세다대학 일본 원정
1912년 황성 YMCA 야구단의 일본 와세다대 원정

 

국내 평정: 일본팀과 미국 선교사팀까지 격파

미군부대 공으로 시작한 가난한 야구단이었지만, 황성 YMCA 야구단은 빠르게 성장했다. 국내에 있던 일본팀과 미국 선교사팀을 차례로 격파하며 한반도 야구를 평정했다.

 

1912년에는 동경 유학생 야구단과 연합팀을 꾸려 한반도의 일본인 야구팀들을 모두 격파했다. 동양협회야구단, 동양척식주식회사, 성남구락부, 그리고 한반도 최강이라 불리던 조선은행팀까지 모두 이겼다.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적수가 없게 됐다.

 

"일본을 정복한다": 한국 스포츠 최초의 해외 원정

한반도를 평정한 황성 YMCA 야구단은 결심한다. "일본을 정복한다"는 결심으로 해외 원정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이는 한국 스포츠 역사상 최초의 해외 원정이었다.

 

1930년 4월 2일 동아일보 「조선야구사」는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기록했다.

 

"日本을 征服한다는 決心으로 그 젊은 사람의 피는 끌엇다."
(일본을 정복한다는 결심으로 선수들의 피는 끓었다.)

 

1930년 동아일보에 기록된 일본원정기록 기사
동아일보 아카이브에서 캡처한 한국야구기록 기사 캡처

 

1912년 11월, 황성 YMCA 야구단은 일본에 도착했다. 7경기를 치를 계획이었다. 첫 경기는 11월 2일 야구 명문 와세다대학 야구부와 도츠카 야구장에서 열렸다.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와 같았다"

당시 일본 언론은 황성 YMCA 야구단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와 같았다."

 

을사늑약(1905년)으로 외교권을 빼앗기고,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나라까지 빼앗긴 시기였다. 야구공 하나에 망국의 한과 민족의 자존심이 모두 담겨 있었다. 그저 야구가 아니라 일본을 이겨야 한다는 절박함이었다. "전쟁터의 병사"라는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일본은 1873년부터 야구를 시작해 한국과 30년 이상 격차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와세다대 원정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하지만 한국인이 일본 본토에서 일본팀과 정식 경기를 했다는 사실 자체가 한국 체육사의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독립운동가 여운형: 한국 1세대 야구선수

놀라운 사실이 있다. 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진 여운형이 사실 한국 1세대 야구선수였다는 점이다.

 

그는 1912년 황성 YMCA 야구단의 주장을 맡았다. 일본 와세다대 원정에도 함께 갔다. 1919년 3·1운동 직후 중국으로 망명한 뒤에는 상하이한인체육회를 조직했고, 푸단대학교 명예교수로 체육부를 담당하며 대학 축구팀을 이끌고 싱가포르·필리핀까지 순방했다.

 

독립운동과 체육이 연결되어 있었다는 게 흥미롭다. 그 시대에 야구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민족 의식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한국 야구 역사를 다룬 영화 〈YMCA 야구단〉 (송강호, 김혜수 주연)

2002년 YMCA 야구단 영화 송강호 김혜수
2002년 영화 YMCA 야구단 - 송강호 김혜수 황정민

 

2002년 한일 월드컵의 해, 야구 영화가 나왔다

황성 YMCA 야구단의 이야기는 2002년 영화 〈YMCA 야구단〉으로 만들어졌다. 김현석 감독이 연출과 각본을 맡았고, 지금 보면 어마어마한 캐스팅이다.

배우 배역 설명
송강호 이호창 과거제 폐지로 방황하던 양반 도령
김혜수 민정림 YMCA 야구단의 창설자이자 신여성
황정민 류광태 호창의 친구이자 친일파의 아들 (포수)
김주혁 오대현 YMCA 야구단의 에이스
조승우 카메오 엔딩 부분 마부 역할

 

2024년 기준으로 보면 어마어마하다. 송강호, 김혜수, 황정민 — 모두 한국 영화계의 기둥이 된 배우들이 한 영화에 모였다. 카메오로 나온 조승우까지 한 컷에 잡힌 장면은 지금 봐도 전설로 회자된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당시에 학생요금 3천원을 내고 IMC9 이라는 인천 연수구에 있는 지금은 사라진 극장에서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난다. 야구와 관련된 영화라면 뭐든지 봤었는데, 흥미롭게 봤던 기억이 있다.

 

영화 속 흥미로운 디테일들

① "뻬스뽈" — 야구라는 단어가 없던 시절
영화에서는 야구를 "뻬스뽈(baseball)"이라고 부른다. 1900년대 초에는 "야구"라는 한국어 단어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영어 발음 그대로 부른 시대 고증이다.

 

② 필립 질레트는 거의 등장 안 함
실제로 야구를 가르친 사람은 필립 질레트 선교사인데, 영화에서는 김혜수가 연기한 정림이 그 역할을 가져갔다. 질레트는 이름조차 거의 언급되지 않고 "선교사"로만 불리며 엑스트라 수준으로만 나온다. 극적 재미를 위한 각색이다.

 

③ 조승우 카메오의 명대사
조승우가 카메오로 출연해 마부 역으로 등장한다. 그가 친 대사 중 "말은 말이오만 탈 수가 없다면 그건 소나 다름이 없지요"라는 애드리브에 송강호가 너무 웃어서 30분 동안 촬영이 지연됐다고 한다. 영화 '춘향뎐'의 이몽룡이었던 조승우가 초라한 마부로 나와 "암행어사 출두요"를 외치는 장면이 카메오의 핵심이다.

 

④ YG패밀리의 OST
OST는 YG 소속 가수들이 참여한 YG패밀리가 담당했다. 지금 들어도 괜찮은 힙합곡으로, 랩 가사에 영화 대사를 차용한 센스가 돋보인다.

 

2002년 한국 스포츠 애국주의의 정점

영화 〈YMCA 야구단〉이 개봉한 2002년은 특별한 해였다. 한일 월드컵으로 한국이 4강에 오르며 "대한민국 짝짝짝짝짝"이 전국을 휩쓸던 해다. 한국 스포츠 애국주의의 정점이라 할 만한 시기에, 일제강점기 조선 야구단의 자존심을 그린 영화가 개봉한 것이다. 시기적으로도 절묘했다.

 

 

황성 YMCA 야구단의 해체와 부활

황성 YMCA 야구단의 끝은 슬프다. 1913년 6월 105인 사건이 터지자 일제는 무고한 조선인들을 잡아갔다. 질레트는 이 사건을 영국 세계선교사위원회를 통해 전 세계에 알리려 했지만 일제 방해로 실패했고, 결국 강제 추방당했다.

 

주축 선수들도 해외 유학길에 올라 흩어졌다. "청년회관팀"이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이어갔지만 강력했던 모습은 사라졌다. 이후 YMCA 황성지부가 일본연맹에 예속되면서 야구단은 해체됐다.

 

YMCA 야구단 영화속장면 스틸컷 김혜수 송강호 장면
YMCA야구단 영화속 장면에 유니폼을 입고 있는 이미지이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2011년 9월 25일, 서울 YMCA 지부에서 YMCA 야구단을 재창단했다. 불암사 야구단과의 공식 첫 경기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사회인 야구 리그에서 활동하고 있다. 100년이 넘는 시간을 건너 다시 살아난 것이다.

 

한눈에 보는 한국 야구 역사 연표: 인천 영화학당부터 SSG 랜더스까지

연도 사건
1899년 인천 영화학당에서 베이스볼 첫 기록
1905년 필립 질레트, 황성 YMCA 야구단 창단
1906년 2월 11일 한국 최초 공식 경기 (YMCA vs 덕어학교)
1909년 동경 유학생 야구단 한국 방문
1912년 11월 일본 와세다대 원정 (한국 스포츠 첫 해외 원정)
1913년 105인 사건으로 질레트 추방, YMCA 야구단 해체
1920년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 (현 전국체전 전신)
1982년 KBO 리그 출범 (6개 구단)
2002년 영화 〈YMCA 야구단〉 개봉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9전 전승)
2011년 YMCA 야구단 재창단 (사회인 리그)
2022년 SSG 랜더스 와이어투와이어 우승

 

인천 야구의 자존심: 동산고와 인천고

인천이 한국 야구의 시작점이라는 사실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인천에는 한국 야구 명문 고교들이 즐비하다.

  • 동산고등학교 야구부: 2016년 4대 메이저 대회(대통령배·청룡기·황금사자기·봉황대기) 모두 우승한 14개 학교 중 하나. 류현진(2003년 미추홀기), 최지만 등 메이저리거 배출.
  • 인천고등학교 야구부: 2020년 4대 메이저 대회 모두 우승 달성.
  • 미추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2003년부터 인천광역시·인천일보 공동주최로 인천 숭의야구장에서 시작된 대회. 한국 고교 야구의 명문 대회 중 하나였다. 2011년 고교야구 주말리그 도입으로 폐지됐지만, 인천이 만든 대회라는 자부심이 있다.

초등학교 영화학당에서 시작된 인천 야구는 동산고·인천고 같은 명문 고교를 거쳐, 지금은 SSG 랜더스가 인천 야구의 깃발을 들고 있다. 100년이 넘는 시간을 인천이 한국 야구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한국 야구 시작 자주 묻는 질문 (Q&A)

Q1. 한국 야구는 언제 시작됐나요?

공식적으로는 1905년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황성 YMCA 야구단을 조직한 것이 시작이다. 다만 1899년 인천 영어야학회(현 영화초등학교) 일본인 학생의 일기장에 이미 "베이스볼" 기록이 있어, 인천을 한국 야구의 실제 출발점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Q2. 황성 YMCA 야구단을 만든 사람은 누구인가요?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Philip L. Gillett, 한국명: 길례태)다. 1901년 한국 YMCA 창설 책임자로 한국에 왔다가, 미군의 캐치볼을 신기하게 보던 조선인들에게 야구를 가르쳐야겠다고 결심해 1905년 황성 YMCA 야구단을 창단했다.

 

Q3. 영화 〈YMCA 야구단〉의 등장인물은 실존 인물인가요?

아니다. 영화 속 송강호(이호창), 김혜수(민정림), 황정민(류광태), 김주혁(오대현)은 모두 가상 인물이다. 다만 황성 YMCA 야구단이라는 배경과 1900년대 초 야구단의 실제 활동을 모티브로 했다. 실제 야구를 가르친 인물은 필립 질레트지만 영화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Q4. 한국 야구의 첫 해외 원정은 언제인가요?

1912년 11월 황성 YMCA 야구단의 일본 와세다대 원정이다. 한국 스포츠 역사상 최초의 해외 원정이기도 하다. 당시 일본 언론은 한국 야구단의 모습을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와 같았다"고 묘사했다.

 

Q5. 독립운동가 여운형이 야구선수였다는 게 사실인가요?

사실이다. 여운형은 1912년 황성 YMCA 야구단의 주장이었다. 한국 1세대 야구선수이자 체육인으로, 일본 와세다대 원정에도 함께 갔다. 망명 후에는 상하이한인체육회를 조직하는 등 평생 체육에 깊이 관여했다.

 

마치며: 1899년의 그 공이 SSG 랜더스로 이어졌다

한국 야구의 시작점은 인천이다. 1899년 영화학당의 한 일본인 학생 일기에 적힌 "베이스볼이라는 서양식 공치기"가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미군부대에서 받은 낡은 공으로, 글러브 없이 맨손으로, 12월 한겨울에도 야구를 했던 그 사람들. 망국의 한을 안고 일본 와세다대로 원정을 떠났던 황성 YMCA 야구단. 영화 〈YMCA 야구단〉으로 다시 살아난 그 시절의 열정. 120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야구는 한국인의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지금. 인천에는 SSG 랜더스가 있다. 1899년 영화학당의 그 공이 멀리 흘러서, 2026년 인천 문학구장의 SSG 깃발이 됐다. 지금도 인천은 한국 야구를 지키고 있다. 다음에 인천 동구 창영동에 있는 영화초등학교를 지나가게 되면, 한 번 멈춰 서서 그 자리를 보시길. 한국 야구가 처음 굴러다닌 자리다. 한국 야구의 원점이다.

 

인천 야구가 자랑스러운 이유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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